오늘 아침의 우리집 설전! 


큰오빠가 들어와 자기 양복을 들이밀며 물어본다. (이미 큰언니와 집에서 논쟁을 한 모양)

"야, 니네가 보기에 이게 회색톤에 가까워 보이냐 갈색톤에 가까워 보이냐"


내 느낌을 딱 설명해보자면 그랬다. 

"브라운 빛을 살짝 띄는 grey톤" 

빛을 받으면 브라운 빛이 살짝 났지만 전체적으로 볼때 갈색톤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갈색톤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검은빛이 너무 많은, 쥐색이나 아주어두운 카키에 가까웠다.


6명중 작은오빠, 엄마, 큰새언니, 나 이렇게 4명은 grey톤, 

큰오빠와 아빠, 2명은 갈색톤이라고 이야기했다.


웃긴건 그 다음부터 큰오빠는 흥분해서 전문가의 시각, 유채색과 무채색 운운해가며 이게 무슨 회색빛이냐. 

틀린거다. 너네가 이상한거다. 라고 소리를 높이더라는것.


안다. 회색엔 색이 들어가있지 않다는것. 큰오빠의 설명에도 긍정했다. 

하지만 보이는 느낌에 그레이톤인 색이 있다. 

처음부터 색이 들어갔냐 아니냐 물었다면 색이 들어가있다고 대답했을지도. 

그러나 '어떤톤에 가까워 보이냐' 를 물었고, 갈색톤보단 회색톤에 가까웠다. 그게 우리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색이 들어가 있으니 절대 회색톤에 가깝지는 않다는거다.


어차피 지각이라는게 그렇다. 실체라기보단 그저 빛이 비췄을때 반사되고 남은 색이 우리 눈에 비추는 것이고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애초부터 지각은 맞고 틀릴 수가 없다. '정확한' 지각이란 있을 수 없다.


인상적인 그림 하나 올린다. 지각심리학에서 배우는 대표적인 그림이다. 
A와 B는 주위 정보들에 왜곡(?)되어 각각 회색과 흰색으로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 지워놓고 보면 같은 색이다. 

그 아래는 내가 직접 그림판으로 주위를 모두 지워본 A와 B이다. 

주위를 지우기 전의 B와 주위를 지우고 난 후의 B(즉 A)를 비교해보면 내 눈이 제대로 보고있나 싶을 정도로 다르게 보인다.



지각이란, 바로 이런것이다. 사실 저걸 '왜곡'이라고 말하는게 맞는건가 싶기도하다. 

왜곡이라기엔 우리 눈이 너무도 분명하게 그렇게 인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눈을 '틀리다'고 규정하거나 오빠의 눈을 '맞다'고 규정하면 안된다. 

지각은 실체가 아니라 뇌의 인지다.


별거 아닌걸 이렇게 길게 쓰고있다니 아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끔 오빠는 너무 말도 안되는걸 옳고 틀림으로 규정하고 우긴다. ㅋㅋ 


그리고 우리집은 늘 이런식의 설전에 시간을 낭비한다.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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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페이스북에 물의를 일으켜, 먼저 당사자들과 거기에 연루된(?) 분들과 그리고 그걸 지켜보셨을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사과를 드립니다. 

제가 빠르게 댓글달 수 없었던 이유는 그때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열고 있는 도중이었다는 비겁한 변명을 해보며 

행사를 치르고 돌아와 짧다면 짧은(이제 긴글은 못쓰겠숴. 흑흑) 변을 해보려고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1. 정치와 혐오에 이용되어 온 성서

성서를 해석하는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인들은 동성애와 죄를 연결짓고 그 근거를 성서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그 근거를 성서에서 찾을 수 있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었죠. 

그리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해석들과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이미 많은 정치적(혹은 정치에 필요한) 이슈들은 성서를 근거로 사람을 교회문 안과 밖으로 가르고 속되다고 차별해왔으며 

몇몇은 후대에 와서 대부분 '죄'라는 오명을 완전히 벗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명백한 죄로 여겨졌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에 동의했고 진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아주 대표적인 예에,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이 있었습니다. 성서에는 흑인은 저주받은 함(이 맞나;) 족속으로, 여성은 부정한 존재로서 

차별해도 합당한, 죄스러운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성서의 시대에는 장애인이 그랬고 과부와 창녀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위에 열거한 모든것들이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고쳐야 할 죄'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성노동자에 대한 많은 시각들이 있을것으로 사료되지만 그것은 차후의 담론거리로 남겨놓지요)

하나님은 과연 그런 문제로 그들의 구원문제를 좌지우지 하실까요? 

2. 그래서 성서는 폭력적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그렇다. 라고 생각합니다. 레위기의 그 수많은 구절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세에게 얘기하지만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어땠을지는 몰라도 현대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 안에는 끔찍할 정도로 폭력적인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성서 자체를 문자적으로 적용했을 때 많은 위험과 오류들을 일으킬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가장 폭력적인 책이 될 수도 있으며 잔인한 책이 될 수도 있음을 말이죠. 

벌써 발끈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으로 교훈과 책망을 하기에 유익한 무오한 것" 이라고 성을 내실 분들의 원성이 들리는 것만 같은데요. 

오해하지 마실 것은 성서가 무오한 책이 아니며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겁니다.

3. 그렇다면 폭력적인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는건가?

역시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예. 입니다. 

다만 성서에 쓰여진 이야기들은 그것의 사실여부나 문자 하나하나보다, 그 뒤에 숨겨진 의도나 의미들이 더욱 중요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성서 한구절 한구절을 자세히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건 성서를 통해 말하시려는 그 분의 의도, 성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주제를 아는것, 

즉, 성서를 보는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저의 이런 태도가 성서를 모독하는 것이라거나 교만한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서를 근본적이고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도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엊그제 제가 어떤 분의 글귀를 인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이 '잘들 한다 ㅉㅉ' 라고 쓴것을 인간이 '잘한다 ㅋㅋ' 라고 써버리면 어떤 일이 생기는걸까 에 대해 고민을 많이했다" 라는 글귀를 페이스북에 인용하며 

'나는 성서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 썼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타인을 그리스도의 품에서 배제하거나 자신들이 쌓은 거룩한 벽 밖으로 밀어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잔인해도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는 것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가장 낮은 자리에 오게 하셔서 모든 사람들을 섬기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 

예수가 성문 안 사람들이 아닌 성문 밖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즐거워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때 

그분은 그렇게 작지 않고,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으며, 그렇게 잔인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분이셨다면 어떤 분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셨을때, 

율법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사람들에게 죄를 '인지' 시키고 다니시는게 예수님의 가장 큰 임무였을 것입니다. 그게 만약 죄라면 말이죠. 

예수님이 21세기에 오신다면 누구에게 찾아가실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죄인의 친구' 시라면 예수님은 정말 '죄인의 친구' 이신걸까요, 아니면 '죄인이라고 비난받던 약자들'의 친구실까요?

4. 동성애가 문제일까? 성 표현방식에서의 착취와 학대가 문제일까.

동성애가 죄처럼 여겨지는 데에는 동성애=음란=방탕=문란 이라는 오명이 덮어씌워져있습니다. 
확실히 성서에는(신약성서에서도) 

성결이나 그 밖의 이유가 아니라 그리고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간 성행위에 수반될 수 있는 학대와 착취를 금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구절들이 존재합니다. 

자, 그런데 이성애에는 그런 것이 없을까요? 이성애는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동성애는 그 자체로 악한 것일까요?


실제로 '동성간 행위'에 대해 언급한 로마서 구절을 연구한 존 보스웰과 L.윌리엄 컨트리먼은 바울이 동성간 성행위를 단죄하긴 커녕 

그것이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라고 가르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이성간 성행위와 마찬가지로 동성간 성행위도 그 자체로는 올바르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며, 

선하게 쓰일 수도 악하게 쓰일 수도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예배에서 '드럼'이라는 악기를 쓰면 악마의 음악이라며 싫어하셨던 장로님들이 떠오르네요.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것은 존재할까요? 음악도 지성도 감정(심지어 분노와 쾌락, 화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이며 

잘 써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없습니다. 악함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하필 동성행위를 언급했는가. 
'로마서' 전체의 계획을 분석해본다면 그 목적이 드러난다고 다니엘 헬미니악이라는 학자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성결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갈라져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려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성결문제를 따지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 로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공동번역)-갈라디아서 5:6

"주 예수를 믿는 나는 무엇이든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더럽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고 또 확신합니다."

(공동번역) 로마서 14:14

베드로 역시 이야기하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불결하게 여기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공동번역) -사도행전 10:28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공동번역)-사도행전 10:34-35

5. 맺기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특정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특정한 관념이 옳다는 시대 속에 살았으며 특정한 믿음의 신조들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신약 성서의 많은 부분은 그런 것들을 깨뜨리는 데에 그 의의를 가집니다. 

성서가 그런 문화와 관념까지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적용하거나 중립적으로 적용하면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이제 그런 문자적 적용들을 경계하거나 수정하는 많은 신학적인 입장과 견해들이 존재하며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고찰해보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시작한 담론이, 텍스트 속에서 저의 부족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로 서려고 하는 많은 동성애 교인들과 그 외 성소수자들, 다양한 소수자 교인들의 앞을 가로막고 상처를 주며 쌓는 

거룩한 벽의 거룩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계속해서 의심하겠다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그들에게 계속 돌을 던지는것일 수 있다는거 아시나요. 여러분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십시오. 

그때 쭈그리고 앉아있던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고 바닥에 쓰시던건 "시발시발시발"같은 멘붕어였을거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짐작해봅니다.

+참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여인에게 하셨던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는 예수님의 대사는, 

역사적으로 배교했던 교회들을 용서하기 위해 후대의 교회들이 추가한 것이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아니 그냥. 그러타구여. 

단언컨데 성서는 제 삶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문자적이고 근본적으로 적용해야 했다면 그것은 제 인생에 그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문장은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라는 책의 추천의 글을 쓴 '존 쉘비 스퐁'의 말이기도 하고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일부는 다니엘 헬미니악의 책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에서 인용하거나 따와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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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이번 수련회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외유' 에 가깝기도 했고

저 또한 수련회를 빙자하여 오랜만에 '보드'를 타야겠다는 욕망이 더 강렬했던

약간은 불순한 의도의 수련회에 가까웠지만, 나름대로 '예배' 에 대한 소망을 조금은 품었었지요 

개인적으로, ,심적으로 제가 요즘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더 그랬어요 



그런 제가 수련회를 다녀온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정말 오랜만에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세미나를 하나 듣고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세미나가 제게는 기도가 되었고 예배가 되었습니다




세미나의 주제는 '이성' 이었습니다

아, 이 얼마나 어렵고도 심오한 주제인가요 ?  

명색이 '이성' 에 관한 세미나라고 했지만 이미 오랜시간 여러번 교회내 세미나에서 실망을 경험한 제게

기대따윈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젠 제목만 대충 봐도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

사실 제가 추측했던 것은 두갈래였습니다

우리 같은 보수적인 교단에서 '이성' 세미나라면 크게 두가지 갈래니까요 


1. 영과 육의 '순결' 을 지키자
- 특히 남자야 그렇다치고(뭐, 이색ㅎ...)  
   여자 늬들은 남편 생길때까지 섹스는 곧 문란행위. 처녀막 단디 챙겨라. (쓰면서도 역겹네요)

2.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성차 (gender)
- 쉽게말하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혹은 아내는 남편을 그리스도에게 하듯 섬길것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따위의 개소리  


하지만 이번 것은 그를 뛰어넘는 신선함 (-_-이라고 해야 하나 이걸) 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많이 부족하더라도 느낀 바와 생각을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1. 성기 중심적 논의

남 녀의 성기구조와 그 모양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양기니 음기니 태양이니 달이니 하는 식으로 남녀를 상징화하기도 했지요

역사적으로는 위의 상징화는 점점 도가 지나쳐  남성은 '씨' 를 뿌리는 능동적 주체이고

여성은 그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밭'의 역할을 한다는 헛소리가 이론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며

사실 이런 논의는 아직까지도 젊거나 어르신들이거나 상관없이 누군가의 입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남성은 능동적 공격적인 '주체'

여성은 수동적이고 포용적인 '객체' 의 역할을 얻게 되었으면서도 

남자아이를 낳냐 여자아이를 낳냐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그 '주체'(그들에 의하면 무려 주체) 가 아닌 '객체' 가 짊어지게 되는 

어이없고도 비겁한 역사가 반복되어왔죠 



+덧

유전학적 지식으로 볼 때 정확히 부와 모로부터 염색체의 반씩을 물려받아 태어나는 아기는 남성의 '씨'(gene) 뿐만 아니라 여성의 '씨'(gene) 역시 동일하게 받게 되는 것이며  maternal gene(모계유전자-ex.미토콘드리아) 이나 maternal effect 와 같은 보다 정확한 유전 현상까지 고려할 때 태아는 오히려 유전적으로는 모계 쪽 연관이 더 큰것으로 밝혀져있습니다

'남자 아이를 통해 대를 잇는다' 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무식한 생각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게다가 남/녀의 성결정은 여자가 가진 X염색체가 아니라 남자가 가진 Y염색체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남자 아기를 낳냐 여자 아기를 낳냐의 문제는 100% 정자를 제공하는 남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수 있습니다 



너무 서론이 길었군요. 각설하고,


이 세미나의 처음은 성기 중심적 논의로 개념 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sex 와 gender 의 차이점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sex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무조건 나쁘고 위험한 존재인 양 설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거기까진 개념 정의의 불완전함으로 그냥 저냥 넘길 만 했습니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옛 말을 언급하시며

남자는 7세부터 페니스가 뻣뻣해지기 시작하고

여성은 7세부터 '액'(이라고 표현하시더군요) 이 나오므로 기분좋음, 쾌락을 느낄 수 있다며

그래서 7세부터는 남녀를 떼어 놓았다는 설명을 할 때에도 

비록 남 녀의 교제를 저런식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액'은 질에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 나오는 육체적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쾌락'으로 인식하는 개념 결여에 불쾌감과 회의감이 몰려왔지만 넘겼습니다

( 보수교단에서 그러한 식의 논의는 이미 지루할 정도로 흔하니까요 )



남 녀의 교제는 육체적으로 진행됩니까? 아니, 거기에 집중되어 있습니까?

네 일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 녀의 교제가 육체적으로 진행됩니까? 아니, 오로지 거기에만 집중되어있습니까?

아니요

그 교제가 진실하다면 절대로 그럴리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교제는 그렇게 단순하고 1차적이지 않습니다






2. 성기 중심적 논의 받고, 남성 중심적 시각 얹고 !

제가 의아해지기 시작한 시점은 남자와 여자의 기질적인 차이를 성기구조로 설명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남자의 성기 구조는 튀어나와있으며 성행위시 여성에게 무언가(정액)를 전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늘 사랑관계에서 여성에게 무언가를 주기 좋아하며 모든것을 주려고 한다는군요
 
이 말씀을 하시면서 풍기는 뤼앙스에 심지어 남자의 이런 기질에 대한 숭고함까지 깃들어 있었다는 느낌은 

그저 저의 기분탓이었을까요? 그랬기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기 구조는 들어가 있으며 성행위시 남성에게 무언가(정액)를 받는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여자는 늘 사랑관계에서 남자로부터 무언가를 받기 좋아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여성을 넘어가게 하려면 루이비x 빽이면 충분하다는 여성 비하적 발언을 듣고

슬슬 진행자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어떻길래 이런 속물적 편견이 형성되어버린건지 의심되기 시작했죠)



사랑을 주고받음에 역할이 정해져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사랑은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호 작용이고 주고받는 것이었죠

그게 물질이든 마음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제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한 쪽만 주거나 받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희생이고 이기심이라고 저는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저의 단언에 기분이 언짢으신가요?

그렇다면 대체 어떤 부분이 그런지 제게 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저는 도무지 이렇게 밖에 생각을 못하겠거든요



더군다나 성교육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성기 중심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논의가 아주 오래전에 폐기되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오히려 요즘에는 이러한 논의가 주는 불균형과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해  

'삽입' 이라든가 '남성이 여성 안으로 들어간다' 는 식의 표현대신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만난다' 는 표현을 더 많이 쓰는 편입니다   
  




3. 가족이데올로기적 논의


자녀는 분명 가정의 축복이고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비정상 혹은 궁극의 사랑의 결실로 표현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불임 부부나 성 소수자의 사랑과 결합

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들의 사랑과 결합을 불완전한 결합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입니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물론 결혼으로 맺어진 두 부부와 자녀를 완벽한 가정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결합은 불완전한가요? 잘못되었나요? 완벽하지 않은가요?

대체 누가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제게 사랑의 중심은 온전한 두 사람입니다 

또한 제게 사랑은 두 개의 깨어진 하트가 만나 하나의 하트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모양, 다른 색채를 지닌 두 하트가 만나 두 개의 또 다른 하트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존재에 대한 지지와 존중이 가장 중요한 사랑의 조건입니다


십분 양보하여 가족 이데올로기의 기준을 가지고 바라보더라도 
 
부부와의 사랑과 부모/자녀의 사랑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한 데 뒤섞어 사랑의 인과, 최고의 결실로 설명하는것은

'자손남기기' 라는 목적 하나가 마치 결혼의 가장 크고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목적인 것 처럼 호도합니다
 




4. 맺기 

제가 나가는 독서토론모임의 멤버 중 한 분이

'그 분은 플러그와 콘센트에 대해서도 남다른 철학을 갖고 계실것 같다' 고 하셨는데요

자, 그래서 결국 플러그와 콘센트에 의인화를 해보자면

플러그는 늘 전기를 줍니까? 콘센트는 늘 전기를 받기만 하던가요?

굳이 의인화하지 않더라도 전류는 그 둘에 동일하게 흐릅니다


단지, 그 둘의 모양이 튀어나와 있고 들어가 있는 이유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개체를 그냥 이어 붙이는 것보다 그렇게 맞물리게 하는 것이

더 '강력한 연결' 이기 때문일 겁니다  

즉, 붙었을 때 쉽게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한 이음새', '굳건한 결합' 을 만들어주기 위한

만든 이의 배려일 겁니다


'튀어나와' 있고 '들어가'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이 '이어져' 있다는 것

바로 그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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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옳고 그름에 목숨을 걸던 때가 있었다

(요며칠 블로깅의 처음이 늘 이런식으로 시작하는것 같다 -_- 왜지?)

이런 유형의 사람을,

MBTI 검사에선 T수치가 높다그러는데 ㅋㅋㅋㅋ 뭐 쨌든.


옳지 않음을 보게 되면 그것을 비판하는 데에 열을 올리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불의가 득세하는 세상,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이 잘되는 세상을 보며

늘 신은 있기나 한건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있기나 한건지 불평하고 원망하곤 했었다


지금에 와서 내린 결론은

세상에 종말이 있다면, 아마 악은 또는 악인은 그 종말때까지 있을거라는 거다


즉,

나 하나가 그것을 비판하고 손가락질해 봤자,

악은 눈하나도 꿈쩍하지 않을거라는 거지.


그러면 나는 앞으로 쏼라- 거릴 이 많은 지면을 할애해가면서

그냥 그러려니-  안주하라는 말을 하고싶은걸까?

물론 아니다 

그걸 눈감아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악'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필요하다 

인간은 참 간사해서 발을 들여놓다 보면 금방 물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분노도 해야 하고 비판도 해야 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뿐인 신의 아들이며 흠없는 분이라고 여겨지는 예수님조차

교회에서 장사하고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상을 부수고(응?) 독사의 자식들아- 꺼지라고(응?) 고함도 치셨지 않은가



문제는 거기에서 그쳐봤자 내가 원하는 '밝은 세상' 은

단 한 뼘도 넓어지지 않을거라는 사실이다

정말 정의로운 세상을, 그 지평을 조금이라도 넓히고 싶다면

내가 '그렇게 하면' 된다



-_- 이쯤되니 무슨 공익 광고의 카피문구 같긴 한데

그냥 가끔 '정의' 에 대하여 떠벌떠벌 말은 많은데, 원망섞인 한탄과 한숨을 내뱉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그 사람들의 삶은 그러한 지독한 회의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할때

그 회의 자체에 묶여 허우적대며 힘들어하기만 할때

정말 정의를 원하기는 하는걸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울 때가 있어서... 

결국 화만 내고 있어봤자 자기 마음만 불행해지는 것을.......

그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만큼이나 나 자신이 할 수 있는것을 하는것 또한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싶어서 이런다

몇 해전 내 가까운 지인중 하나가 그랬었고...

(하긴 내가 누굴보고 지금- 하는 생각도 역시 들고 있으나 써내려가는 글은 끝까지 써야하니 조금만 참아주시기를)



게다가 살다 보면 그 '옳고 그름' 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순 없는 상황이 반드시 온다

때론 '옳고 그름'이 그 자체로 족쇄 혹은 원칙이 되어

정말 커다란 선의는 보지 못하고 그 원칙에 갇혀버리는 일이 생기는데

이 상황에서 정말 정의 = 원칙 으로 등식을 세울수 있느냐는 것이다


심리학에 보면 콜버그라는 사람이

'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아내를 가진, 그러나 아내를 살릴 약은 살 돈이 없는 남편 heinz씨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국의 유리창을 깨고 약을 훔치는 것이 불법인가? '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양상을 분류해 도덕의 발달 단계를 몇가지로 나눠놓았다

이걸 'Heinz 의 딜레마' 라고 하는데

그 행동 자체에 대하여 옳다/그르다 를 판단하는지

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어떻게 합리화 하는지에 따라

도덕발달 수준을 '전인습적 단계, 인습적 단계, 후인습적 단계'로 구분한다

행동 자체에 대한 옳고 그름, 그 원칙만으로 모든 상황을 적용하기에는

때로 인생은 너무 ... 뭐냐... 에... 애매한 경우가 있더라는 거지


이쯤에서 

그렇게나 옳고 그름에 목매었던 내게 충격을 주었던 누군가의 기도 한구절이 기억나서

그 말을 끝으로 허접한 끄적임을 급 마무리 한다 !

(대체 뭘 말하고 싶은건지 좀 글이 분열적이긴 하지만 대강의 맥은 잡으셨으리라 믿어본다 )


 
 
 
 
 

아름다운 기도

                                                                          송기원 교수


나와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습관을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형이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컵은 즉시 씻어 둔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제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 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 다 날아가고.

뭐 땜에 비싼 돈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바르지. 확 부어버려. 맹물 부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 붙여 놓은 것 아니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게 있다.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gift)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 진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 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 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쩍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 더러 뚜껑 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제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저는 저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저를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제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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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찍 자겠노라는 거짓말을 부모님께 살짝 흘린 후에 부모님 몰래

방에서 100분토론 500회 특집을 봤어요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건 봐야했어욧!!)

사실은,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저자, 야식을 즐겨하시면서도 샤프한(??) 박경철쌤하고

우리의 영원한 진뽀로로 진중권씨 등

맘에 드는 패널진이 출연하기에 참 오랜만에 '닥본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것인데 

와우-

그 두분의 존재를 잊게만들 정도로 눈이 부신,

멋지고 아름다운 인간 생명체를 보았달까? ㅋ

(내가 남자였다면 이 말은 참 여러 의미로 오해를 불러일으켰겠지 ㅋㅋㅋ)








배우 김여진씨 말입니다

난 사실 그녀에 대해 잘 몰라요 배우로서 몇번 봤을 뿐이죠

예전에도 잘 몰랐고 사실 이 글을 쓰고있는 지금도 잘 모릅니다

분명한건 이제 그녀를 알고싶어졌다는 것이죠

만약 인디쪽에 있는 예술가였다면 그 자체로 소수자 혹은 약자의 입장이므로

이 모든 행보가 이해가 갈 수도 있었을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뚜렷이 나눌수는 없지만 굳이 나누자면-어엿한(음?) 메이저 급의 배우가 아니던가요

물론 조금 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쟁점들은 이미 인디이냐 메이저이냐를 넘어선 문제라는걸 알고 있을것이고 

아주 극소수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사실 '인디' 에 속한다는 것 또한 이미 깨달았을테죠

네, 저도 그걸 몰라서 의문이 든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이러하든 저러하든 메이저 급의 한 여배우가 이러한 행보를 한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닙니다




<홍대 용역노동자 집회 때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 활동 인터뷰>
 





어제 100분 토론중 김여진씨가 한 발언을 보실까요?

"사실 저는 젊은이들의 꿈이 대기업따위(ㅋ)가 되는 건 좀 반대에요 저는 단순히 뭘 뚝딱뚝딱만드는...
 이제 세계가 그렇게 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스티브잡스가 왜 영웅이겠어요.
 아이디어고, 생각이고, 스토리에요. 이런것들이 앞으로 미래가 될거라는거에요. 그러면 이 젊은이들에게는
 자신이 갖고있는 꿈, 발칙한 상상력들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야하죠. 하지만 굶어죽고있다는거죠
 음악했던 한 친구도 가난에 가난에 죽음까지 이르렀고요(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이야기)
 그런 상황이라는거죠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더 비참한 상황에 처해있고"

"청소하시는 분들 저는 그분들이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학교가 보유금을 늘려서 좋은 건물을 지어놔봐요 그분들이 1주일만 청소안하면 거기 개판이 되죠
 뭐가 더 중요하냐는거에요 그분들의 노고에 대해서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주거나
 아니면 고정도 줘놓고 정~말! 생색내요"

 "제가 만약 누구도 이뤄보지 못한 어떤 발칙한 꿈이 있다면 '나는 청소노동자로 살아도 돼' 라는 배짱이
 있어야해요. 낮에 청소하고 밤에 창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거에요. 그거해서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거에요
 그거해서 못먹고 살아요 지금.
 삼성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는 없잖아요. 언제까지요.
 사람들이 꿈을 꾸고 피어나고 이 나라가 훨씬 더 나은 수준이 되려면 그걸 받쳐줄 수 있으려면
 청소 노동자들 뿐 아니라 정말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복지 수준이 지금보다 월등히 높아져야 한다는거죠"


비록(?) 말 좀 한다는 사람들의 젠체하는 자세나 현학적 표현, 고루한 이론적 용어는 전혀 쓰지 않았지만

날 것으로서 이것보다 더 진정성있고 비수처럼 날카로운 지적이 있나요? 

글로만 올려놓아서 좀 아쉬운데, 어제 이 발언을 하는 김여진씨의 얼굴을 함께 봤다면 더더욱 느꼈을거에요

그 답답함 안타까움




 
<홍대 용역노동자 파업 지지 연설>
 





메이저의 자리에 있는 배우로서 굳이 이러지 않아도 괜찮은, 사는데 문제가 없는 배우로서

인권이라든가 노동자에 대해 이정도의 감수성을 갖기란 정말 쉽지 않아요

어제 100분토론에서 김여진씨의 말에 여러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어제 발언들에 울컥했다고 고백하더라구요

그 안에 있는 진정성은 정말 존재하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날 것으로 전해질 수가 있었을겁니다


'날라리 외부세력'이라는 팀(?)을 이끌고 계시더라구요

네, 저도 어제부로 그 세력의 언저리에 발을 찔끔 담갔지요


가끔은

내가 진정으로 가슴뛰는 일을 자꾸만 '미뤄둔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슴속에 있는 열정을 자꾸만 자제시키면서요 


기왕 웅크린거 조금 더 웅크릴거에요

지금은 비록 마음으로만 응원하지만 봄이 되어 펄쩍 뛸 수 있을 때가 얼마 안남았어요!!

자, 저도 곧 진정한 날라리(?)가 되어볼까 합니다


김여진님 앞으로도 선한 영향력이 되어주세요 저도 그 외부세력으로 힘을 보탤께요

낄낄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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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걸 좋아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아한다기 보다

마음을 숨기는 법을 잘 몰라서,

너무 쉽게 '이게 내 속이요~' 하고 훤히 내보여주곤 한다 


이런 내 솔직함이 어떤이에게는 참 신선하게 다가오는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론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가끔, 누군가에겐 만만함으로 읽힐 때

내 마음은 조금 상처를 받는다 



사람들은 고맙게도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누군갈 편하게 만든다는건 그 자체만으로 참 큰 장점이기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고맙고

또, 내가 경계를 풀고, 마음을 여는만큼 상대방도 그렇게 해주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리고 난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그렇게 해줄때 고맙고 기쁘다
 


앞으로도 난 솔직할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게 천성이라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걸 잘 못하기 땜에 그렇다 


그치만 그래서 나를 '막 대해도 되는 사람' 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여,

여러분들에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내가 당신에게 마음을 보여주는건 

당신에게 덜 중요하게 취급받고, 덜 가치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는 아니다

나는 그런 취급을 받을만큼 덜 중요하고 덜 가치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라기 보단,  내가 당신에게 마음을 쓰는건

그저, 당신이 나에게는 귀한 사람이라서 그렇다... 그 뿐이다.

부디, 그런 내 마음 정도는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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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onjae 2010.12.07 01:15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사람들은 편해지면 도를 지나치는 실수를 하곤하지. 그때가 가장 중요한 순간인줄도 모르고.. 너무 맘에 담아두지 말공 과감히 싹뚝 자르는 용단을 내리는건 어떠신지~ 웃으며 삽시닷~ 미나양^^

    • Favicon of http://la-pluie.tistory.com BlogIcon Michael Jo 2010.12.19 01:0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응. 고마워오빠.
      나도 늘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살고싶어
      근데 때론 나도 화를 참지못하고 이렇게 되네.
      내 홈피인데도 오랜만에 이렇게 와서 오빠 글을 보니까 힘이나네. ^^ 땡큐.